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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미술 현장의 동향과 평가 / 미술 감상 안내   
신학철, 우리가 만든 거대한 像


 

신학철, 우리가 만든 거대한 像

                신학철의 현장





성완경, 미술평론가, 인하대학교 교수



 







1.

      한국근대사-종합, 캔버스에 유채, 1983,

      390x130



1980년대와 호흡을 함께 한 민중화가는 많다. 그 가운데 아주 큰 이름으로 신학철이 있다. 그의 몇몇 작품은 당대의 민중운동의 공간 속에 가장 우뚝 높이 걸린 제단화에 비유될 수 있다. 그는 '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민주화 투쟁 시기에 이 땅의 민중적 사회변혁 운동과 호흡을 같이 하며 민중의 애환과 희망을 그리고 민중적 역사 전망의 숨결을 불어넣은 바리케이드 위의 공공미술가, 역사화가였고 농민화가, 노동운동 미술가였다.



신학철은 1960년대 말 서구 전위미술의 적극적인 수용으로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70년대 중반의 오브제 작업과 '70년대 후반의 콜라주 작업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삶을 위협하는 대량소비 사회의 물신성을 충격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삶의 현실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80년대 초반 신학철은 보다 구체적인 역사 현실로 다가가 우리의 근현대사를 특유의 해석과 탁월한 상상력으로 포착한 「한국근대사」 연작들을 발표하면서 화단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 연작은 일제 하 우리 민족의 수난으로부터 독립운동, 해방을 거쳐 동족산장의 전쟁과 분단, 전후의 굴절된 정치사와 사회사, 외래문화의 범람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의 수난사를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 형상화한 뛰어난 역작이자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이 후 그는 우리의 민족사를 단지 '수난'이라는 부정적 시각에서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오는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과 민족문화의 힘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 미래의 통일된 세계 내지는 바람직한 민족공동체에 대한 염원과 그 묘사에로 발전해 나갔다. 이것은 1980년대 민족미술의 흐름 속에서 그가 획득한 긍정적 전망이자, 이후 우리미술이 나갈 길을 예시해 주는 중요한 성과라고 평가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그의 작업은 농촌과 노동자 그리고 서민들의 삶 쪽으로 그 시선이 이동한다. 자연주의적 농민미술이나 노동운동 미술의 양상을 띈 이 시기의 작업은 그의 관심이 역사나 정치 그 자체로부터 그것의 배경을 이루는 민중 쪽으로 더 넓게는 서민의 삶으로 관심이 이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가위(왼쪽), 1974, 오브제, 45.5x33.3

                      부활(오른쪽), 1979, 오브제, 72.7x53

이와 더불어 그의 그림은 '80년대 「한국근대사」연작의, 특히 정치사 중심의, 그 용트림하며 위로 감아 올라가던 수직적 구조로부터 강물의 흐름처럼 옆으로 흐르는 서민적 삶의 드라마로, 수평적 흐름의 구조로 바뀌는 시도를 보여준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 발표한 대작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는 10여 년 간을 끌었던, 그리고 아직도 진행 중인, 이 대하 드라마 그리기의 중간 결산이었다 할 수 있다.



이 전시는 1982년(서울미술관, 서울 구기동), '87년(온다라 미술관, 전주), '91년(학고재, 서울 인사동) 이후 네 번째가 되는 그의 개인전이다. 비교적 큰 규모의 회고전 겸 신작전이랄 수 있는데, 전시기획의 내용과 작가 세계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전시기획자의 별도의 글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신학철의 작업과 그 현장을 그와 동시대인으로 살면서 보았고 느꼈던 사람의 입장에서 지금 어떻게 보고 느끼고 있는지를, 가급적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얘기해보고자 한다.



2.



신학철의 작업은 역사적 격동과 민중의 에너지와 호흡을 함께 한 현장의 예술이었고, 미완의 현재의 산물이었다. 그의 그림은 동시대적 현실의 끈길짐, 현실의 속박과 함께 가며 그 속에서 그려진 것이다. 이런 창작 태도와 미술 인식의 방식은 당시의 한국현대미술의 주류 쪽의 미술 인식 방식에 대해 날카로운 대립각을 이루는 것이다. 신학철은 이제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를 형성해 왔던 이른바 형식주의적 모더니즘의 순수성을 거부했다.

       목사-802, 1980, 콜라주, 60.6x80.3

그는 자신의 예술이 그 모태이자 그 관객이기도 한 사회 및 사회대중에 대하여 그리고 역사 및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되는가에 대해 깊은 고뇌와 성찰을 했던 작가다.



그의 예술의 경력에서 흥미 있는 것은 그가 모더니스트로부터 출발하여 나름대로 내공을 쌓는 과정이 있었고 그 후 민중 미술가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신학철은 1964년 대학 입학 후 처음엔 구상 그림을 그리다가 3학년 때 팝아트를 발견했고 이후 여러 새로운 서양 현대미술의 형식에 이끌리며 다양한 시도들을 해보게 된다. '69년부터 AG그룹에 참여했고, '75년 AG 해체 이후 『서울 방법』展에 참여했지만 이와 동시에 이 때부터 현대주의 미술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하고 탈출구를 모색한다.

       한국근대사-4,1982, 갠버스에 유채, 128x100

결국 치열한 회의와 주체적 내공을 통해 '홍대 논리'(실험적 모더니즘 미술 내지 아방가르드 미술의 한국적 번역판)의 극복에 성공한다. 즉 시인 황지우의 표현을 빌어 표현하면 "한국 모더니즘의 뒷문을 열고 나오는 데 성공하고", '82년 개인전으로 화단에 충격 선사하며 화려한 데뷔를 한다.

 



이 탈출 혹은 전환의 계기는 작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소통과 공감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욕구였다고 한다. "모더니즘 미술의 극복 방향을 모색하는 중에 그림엔 무엇보다도 우선 강한 느낌, 강한 감동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방안으로 그림에 여기 현실의 이야기 곧 한국의 역사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소통의 단절은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병폐이고 문제였다. 여기서 초점은 모더니즘 미술의 무중력 상태와 소통 단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고민하던 신학철이 그 극복 방안으로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 다다랐다는 점이다.

        한국근대사-초혼곡, 1994, 캔버스에 유채, 244x122
그는 실제의 삶, 사건과 사물의 실재성, 의미와 소통의 문제 등을 생각하면서 점차 그 매개체로서 사진과 오브제의 문제에 깊이 천착하게 된다. '74년에서 '79년까지 그가 했던 캔버스 위에 실로 묶은 오브제를 부착하는 작업들에서는 그가 사물에 불어넣는 기가 느껴진다. 여기서 핵심은 사물이 유기적 생물체로 전환되는 느낌이다.



1979년에서 '80년대 초 사이의 콜라주 작업들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그 이미지들이 정교한 조립과 회화적 조정에 의해서 매우 풍부하고 설득력 있는 초현실주의적 경관과 서사적 그림의 언어로 전환된 점에 있다. 콜라주에 현실과 문명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담기기 시작하면서 오브제(이미지)는 현실적인 의미를 띄게 된다. 아니면 그 역으로의 설명이 더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브제(이미지)가 현실적 의미를 획득하면서 콜라주 작업이 현실과 문명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나한테는 대상이라는 오브제의 느낌이 중요한 것 같아. 실로 감는 것도 오브제이고, 지금 하는 작업(서민사 주제 작업)도 오브제라고 볼 수 있어. 실제물건이 아닌 사진도 오브제고, 역사책에 나온 사진 자체도 오브제이고 문자로 된 그 자체의 역사도 오브제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오브제에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거지. 처음에는 사회와 관계가 안되더라도 느낌만 오면 오브제로 사용했었는데, 콜라주로 넘어오면 현실과 문명, 역사와 연결되면서 오브제가 현실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거지. 쉽게 생각해 보면, 독재정권을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두환이라는 얼굴을 넣으면 그것이 군부독재라는 거야. 내 그림언어는 사람이나 물건 자체가 서술하고 설명해주는 거지 

-----   박찬경과의 인터뷰. <문화과학>, 1999 가을호



역사와의 만남은 이렇게 오브제를 매개로 하여, 이미지의 오브제적 가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오브제 작가 신학철이 조립한 이미지들의 기이한 건축, 콜라주된 수난사의 회오리 기둥은 「한국근대사」라고 명명되었다. 영상성과 조각성의 좀 불편한 공존이나 다큐멘터리와 픽션, 리얼리즘과 초현실성의 좀 기이한 혼합, 그리고 양식에 있어서의 다소 아나크로닉한(시대착오적인) 느낌(마치 다른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 같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이 연작 그림들은 그 주제의 통합성과 즉각적인 현실적 환기력 덕분에 명료하게 읽혀졌고 민중적 시각서사의 새로운 전범으로 담박에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한국현대미술의 사대적 식민성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기류와 민주화운동 내지 민중문화운동의 현재적 진행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 작업은 '다른 미술사'(민중적 현대미술사)의 시작, 한국미술의 '자생적 전환'의 시작으로 의미 부여되었다(이런 시대상황의 진전 속에서 콜라주 연작들의 전위성과 미학적 성취는 상대적으로 가려진 감이 있다).

                  모내기, 1987, 캔버스에 유채, 162.2x112.1


이 자생적 전환이 보다 풍부한 의미를 확보하게 되는 것은 그의 작업이 보다 민감하게 시대의 호흡을 담아내면서 현재 진행 중인 사회변혁운동의 컨텍스트 속에 놓이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하면서였다. 그의 그림들은 이 진행 중인 역사 속에서 미완의 현재의 산물이 된다. 과거사가 아닌 바로 그 당시의 정치 정세의 변동 속에서 사건들과 군중들의 시위, 그 함성과 탄식, 고통과 열광을 함께 하며 그려졌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의 「한국근대사」연작으로부터 87년 유월 항쟁 직후의 「한국현대사」 연작으로의 작업 내용의 변화는 그가 더 확고한 참여 미학 쪽으로, 민주화 운동과 민중운동의 현장 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결과였다.



1980년대 우리사회의 민주화 운동의 큰 물결과 이에 연대한 민중미술가들의 활동은 '87년 6월 항쟁과 같은 해 7, 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정점에 달한다. 그가 「한국현대사」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그 전후였다. 이것은 민주화운동과 노동 해방운동의 현장에서 동행자들의 의지를 결속시키는 일종의 깃발 그림이나 제단화에 비유될 수 있는 그림들이다. 이 연작에 담겨진 연대감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은 6월 항쟁 이후의 민중역량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정치 상황의 전개가 꼭 이에 맞아떨어지며 전개된 것은 아니었고 상황은 차츰 착잡하고 복잡한 것으로 되어갔다.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 2002, 캔버스에 유채, 122x200x8

'87년 대선 이후 뭔가 꼬이기 시작했고 운동은 일정한 초조감 속에서 희비를 반복하게 된다. 사회변화에 대한 희구와 승리의 확신 못지 않게 좌절과 탄식, 분노와 무력감 같은 것도 서서히 자리하던 시기였다. 1991년에 「한국현대사」 연작의 하나로 그려진「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이러한 시대 상황의 전개 속에서 희망과 기원과 비통함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3.



1990년대 초반이후 국내외 정세의 전반적 변화와 더불어 민중미술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다시 김영삼으로 (그리고 그후 김대중의 국민정부로) 이어진 정치 정세의 흐름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정착 그리고 같은 시기 유럽에서의 현실사회주의권의 급격한 붕괴와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세계 질서 재편과 더불어 전반적 사회 분위기와 그 중심 의제가 달라지고 민주화 운동의 양상도 달라졌다. 최루가스와 투석, 분신 자살 등이 이어지던 가두 투쟁과 시위문화가 사라지고 운동권이 해체되면서 '80년대 식 민중문화운동과 민중미술은 점차 그 입지를 상실하고 부진과 쇠퇴를 겪었다. 신학철의 독자도 점차 사라졌다. 이제 풍경이 전면적으로 바뀐 것이다. 민주화 투쟁의 '현장'이 증발하면서 관중 또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바뀐 풍경 속에서 그는 그림 그리기가 전보다 더 어려워진 자신을 발견한다. "이젠 진짜 대중하고 맞부딪치게 된 것인데 그러면서 그림 그리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고 그는 고백한다.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 2002, 캔버스에 유채, 122x200x8의 부분


신학철은 변화를 이룬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 변화의 폭이 적었던 작가이기도 했다. 어쩌면 민중미술의 1세대 작가이자 중진작가로서의 무게가 자기 갱신을 더디게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의 그의 궤적은 더디고 둔탁하고 모호한 것으로 진행되었다. 자신의 기질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예술적 성취의 무게로 인한 운신의 폭의 제약에 의해서든, 아니면 '90년대라는 시대상황의 원천적 모호성 때문이든, 신학철은 사실상 그 예술의 운신이 크게 자유롭지 못했던 작가였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 시기 그는 중산층 연작을 시도해 보고, 노동자와 농민도 그렸고 「한국현대사」 연작도 계속 더 그렸다.



신학철의 농촌 주제의 그림은 도시적 주제의 작업과 일정한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농촌을 그릴 때는 유화로 그렸고 도시를 주제로 작업한 것은 포토콜라주에 의한 이미지 몽타주 기법을 썼다는 점이다. 농촌을 그린 그림들에선 오브제의 중성성과 차가움이 아닌 작가 자신의 감정과 서정성이 느껴진다. 따뜻한 서정과 친밀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그리고 자연주의 풍으로 그리는 데, 유화가 더 맞았기 때문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작업들에서는 자신의 체험된 세계와의 연속성이랄까, 개인이 느껴진다. 농촌은 그의 고향이고 그 상상계는 늘 실제보다 아름답게 투사된다. 그것은 늘 상상화다. 자연주의 양식이든 혹은 삐라 그림이나 삽화 그림 같은 양식이든, 실사이든 상상화적 양식이든. 「모내기」이든, 「바우고개」이든, 혹은 「마지막 농부」이든, 고향은 항상 상상화다.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 2002, 캔버스에 유채, 122x200x8의 부분


이에 반해 도시적 주제의 그림들은 기호적(미디어적, 광고적)이고 현란하며 비개성적인 느낌을 준다. 현란하고 물질적인 소비적 이미지들의 공격적이고 괴물스런 조합이라는 점에서 강렬하고 충격적이기는 하나 추상적이고 일반적이고 비개성적인 언술로 느껴진다. 사실 신학철은 그 기본적 감성이 도시에 매우 이끌리는 성향이면서도 도시를 깊이 있게 표현하지는 못한 편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말한다. 신학철의 그림에서 도시는 부도덕한 풍요의 장소로, 타락한 자본주의의, 신식국독자의 현란한 스펙터클의 장소로서 파악된다. 도시와 상품과 이미지는 그 부도덕성과 타락상을 냉소하고 적대하고 증오하기 위해서 극단적 대립의 충격 효과와 그로테스크 미학 속에서 재현된다. 농촌에 그늘을 드리우는, 농촌의 대척점으로서의 악의 표상이 도시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사실 도시는 그가 증오하는, 싫어하는 대상을 발견하는 장소로서만 의미 있는 또 하나의 상상계인지 모른다("난 자꾸 싫은 것만 만나게 돼. 지금도 보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그리게 돼. 그걸 가지고 내가 욕을 해야 하니까." 위 인터뷰). 그의 도시는 극단적이고 추상적이고 도식적이다.



이 일반적 추상적 투사는 거꾸로 농촌 그림의 '개념적' 틀 속에서도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그의 농촌 그림은 농촌 그 자체가 아니라 도시의 효과의 그늘이라는 틀 속에서 그려진다. 이를테면 「신기루」, 「버스」, 「새참」, 「서울 길」. 「시골 길」, 「고개 길」, 「봄바람」 등 농촌 주제 그림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주인공 시골처녀가 서울로 떠나는 구도, 다시 말해 대도시라는 블랙홀 속으로 농촌의 순결성이 흡입되고 훼손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도시는 애드벌룬이나 블랙홀 같은 것으로, 화려하고 위험한 유혹이나 사악하고 어두운 구멍으로, 경계와 원망과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으로, 소비문화와 힘센 자본가가 지배하는 소돔의 나라로 파악된다. 곧 중심부라는 타자에 의한 주변부(주인공, 향토, 순결성)의 수난의 구도로 나타난다.



이와 짝을 이루는 도시 속 이름 없는 서민들의 삶의 초상은 그들의 농촌적 뿌리를 드러낸다. 리어커 행상 아줌마와 그녀를 단속하는 시장 경비원(「갑순이와 갑돌이」)이나, 차 배달하는 다방 레지(「갑순이」)의 투박한 모습에는 그들이 떠나온 농촌의 그림자가 아우라처럼 어려 있다. 이와 달리 아직도 농촌을 지키며 살고 있는 「신새벽」이나 「땅거미」 속의 농민, 「씨 뿌리는 여인」이나 「까지꺼 한잔하고 해치웁시다」의 건장한 체구의 농민이 있다.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 2002, 캔버스에 유채, 122x200x8의 부분
이들의 모습은 노동의 당당한 무게와 더불어 존엄하고 경건하게 혹은 따뜻하게 그려지는 데 아마도 이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작가가 꿈꾸었던 이상이 농촌에 투사된 결과가 아닐까 추측된다. '노동자로서의 농민' 혹은 '노동 연대'의 표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 역시 실제상이라기 보다는 특정한 개념의 투사이기는 마찬가지다.



주의해보면 도시라는 상상계와 농촌이라는 상상계의 이 이원적 대립은 시골, 가난, 순결, 수난, 땅, 민족 등에 관련된 우리의 민족사와 근대 경험의 뿌리깊은 상징작용의 반영일 수 있다. 농촌이나 향토는 궁핍과 수난이라는 상징과 연결된다.



문학평론가 권명아에 의하면 궁핍과 수난은 분단 이후 한국사회의 국민 통합 이데올로기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궁핍과 압박과 수난은 공통의 기억, 공유된 기억이 되면서 과거에 대한 기억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치 기획에 공감하고 미래에 대한 공통의 전망을 갖도록 강제하는 '공감'을 창출한다. "향토는 궁핍의 파토스가 실현되는 상상의 장소"라는 것이다. 권명아는 "향토가 자아내는 공감이 어떻게 파시즘의 정치기획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주목한다(권명아, '궁핍의 파토스와 국민문학화', <파라 Para 21>, 2003 가을호).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향토'라는 상상계에 관련된 스테레오타입이 어떻게 파시즘의 정치기획과 유사한 방식으로 민중미학의 무의식 속에 내화되었는가를 불편한 마음으로 질의해야 할지 모른다.





4.



신학철이 1990년대 이후 구상하고 있던 이른바 '옆으로 가는 그림' 내지 '서민사'라는 기획은 2002년 16폭의 캔버스에 총 길이 20미터 높이 2미터의 위용으로 (일단 중간 결산식으로) 완성되었다. 제목은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 이 작품은 약 10년 이상의 잠복기를 거치며 성숙되었다. 개별작품으로 이 소재를 처음 그린 것은 1991년이다. 옆으로 가는 대작 벽화 형식으로 작품 전체의 첫 스케치가 콜라주 형식으로 나온 것이 1998년이고 그 후 2년 지나 작품이 완성되어 광주비엔날레에 걸렸다.



1980년대 말이래 신학철의 관심은 점차 정치사로부터 민중사로,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서민사로 옮겨간다. 한국현대사의 실질적 주역은 이름 없는 장삼이사들이라는 것, 곧 '50년대로부터 '90년대까지 전쟁과 가난과 '잘 살아보세', 압제와 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졌던 우리 사회의 '압축근대화'과정에서 이름 없는 민중들, 곧 정치사의 표면 너머 저 아래쪽에 깔려 있는 (그래서 잘 보이지 않았던) '갑돌이'와 '갑순이'들의 존재와 그 삶의 내용이 이 사회 변화의 실제 주역이었다는 것을 그는 점차 깨닫는다. 이것은 그가 우리 역사의 무의식에 점차 관심을 갖으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역사의 무의식이란 그에 의하면 '민중사의 에너지'로 정의된다. 특히 그는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를 엄청난 에너지로 보면서 서민이나 노동자만이 아니라 군부독재나 재벌 등도 무의식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보려고 한다. 말하자면 전두환이나 정주영이나 전태일이나 신학철이나 모두 갑돌이라는 것이고 꼭 같이 무의식의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의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도시-농촌-근대성-변화-민중간의 상관 관계에 있을 것 같다. 농촌과 도시라는 서로 판이하게 다른 두 공간은 대부분의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독특한 연속체를 이루고 있고 거의 동질적인 전체성, 곧 근대성의 체험으로 귀결된다. 근대성과 변화, 발전과 출세를 수용하고 욕구하는 모든 대한민국 '촌놈'들의 생명력이 그 둘을 하나로 엮으며 관통하는 에너지이다.



근대 한국을 살아온 대다수의 그냥 보통 사람들, 지지리 고생하면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 농촌을 떠나 도시에 유입된 많은 표준적 한국인들의 삶의 본능 속에는 사회적 상승에 대한 강력한 욕구와 추동력과 더불어 근대적 삶의 형식과 변화, 속도 등에 대한 깊은 매혹과 동경이 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변두리 삶의 정서다. 변두리 삶의 이 야생성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중심부에 대한 열망이다. '변두리에서 중심부로'라는 도식은 대다수의 보통사람이 갖고 있는 삶의 기본 색깔이자 열망이다.



주변부에서 중심부로의 진출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대부분의 한국인이 버리지 않는 또 한가지 열망이 있는데 그것은 파괴와 회귀, 변화와 보신, 발전과 전통을 한꺼번에 거머쥐려는 욕심이다. 이 욕심은 전쟁, 피난, 이농, 가난, 이별 속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살아남는 것, 계속 커지는 것, 넘쳐나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본능 같은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삶의 기본 냄새다. 무자비한 발전과 파괴, 많은 변화와 찢겨짐과 괴멸, 그리고 이 모든 생존의 난리 속에서 우리를 버티게 하는 어머니 같은 것, 짠 눈물과 매운 고추, 땀과 희망, 사랑과 치정, 환희와 보약 같은 것이다.



온갖 모순과 찢겨짐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의 속도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보통의 민중들은 변화 그 자체에 대하여 긍정적이다. 바로 이 긍정, 근대화에 대한 깊은 신뢰, 변화와 호전, 상승과 증식, 자기 성취와 행복, 발전과 확장에 대한 열망이 이렇게도 강한 민족이 있을까.



(그는) 바로 그런 민중의 한 사람이고, 꼭 같은 갑돌이로서 나누고 있는 열망, 그것이 그의 생명력이고 밑천이다. 그가 가장 저항적인 순간, 이를테면 분단과 개발 독재, 국가주의나 기업주의, 공해, 미군 주둔 등에 대해 비판적인 순간에도 그 밑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은 이 생명력이고 변화에 대한 긍정이다. 현실에 대한 그의 어떤 냉소와 비판과 공격도 결국은 그 생명력의 이름으로, 긍정적 근대성의 이름으로, 민중의 상식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위 연속 인용은 3년 전 한 갑돌이 화가에 대해 내가 썼던 글에서 온 것이다(졸고, "임옥상에 대하여", <벽 없는 미술관>, 생각의 나무 2000). 여기서 갑돌이는 임옥상일 수도 신학철일 수도 있다. 임옥상은 열두 살 때 부여에서 서울로 왔고 신학철은 스무 살 때 김촌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농촌과 도시의 공존, 변화와 호전에 대한 신뢰, 긍정적 근대성과 민중의 상식, 개소주이자 비빔밥이고 고추장이기도 한 것, 아마도 이것이 신학철과 임옥상의 예술을 그리고 갑돌이와 갑순이를 한데로 묶는 그 질긴 서민적 생명력의 핵심일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 2002, 캔버스에 유채, 122x200x8


신학철의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는 그 용광로와 같은 생명의 에너지를 거창한 벽화 형식 속에 담아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화면 전체를 횡단하고 있고 이것은 군사기갑시설과 공장의 중간쯤 되는 불길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거대한 기계 구조물들과 그 사이사이 배치된 민중들의 소용돌이로 나타나 있다. 그들의 얼굴은 한국의 현대 정치사와 민중사의 모든 실명들의 얼굴이다. 저 멀리 배경의 위쪽에는 대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강대국의 정치 리더와 자본가, 한국의 5.16 군인들, 기업인들이 있다. 화면 전체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연속된 볼륨을 이루며 배경을 가로지르는 그로테스크하고 거대한 기계 구조물의 흐름이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출향과 이별, 열사들의 죽음과 화염병 투척, 소비와 환락의 불야성,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괴수의 벌린 아가리, 꿈틀거리는 근육과 기계의 혼성물 등이 이 볼륨의 흐름에 시각적 뼈마디를 형성한다. 거대한 야수-기계는 입으로 붉은 쇳덩이를 토해내며 미지의 어둠을 향하여 달린다. 작품의 곳곳에 배치된 인물과 장면과 형태들은 그의 이제까지의 작업의 전 양식과 도상을 포괄하고 종합한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은 신학철의 신학철, 곧 신학철의 민중사이자 미술사이기도 하다. 왼편의 도입부를 이루는 상징도상(갑돌이)이 자신의 얼굴이고 그의 고향이다. 고향을 떠난 갑돌이와 갑순이는 도시 공간 속에서 수많은 다른 갑돌이와 갑순이와 섞이며 서민사라는 삶의 물결의 일부가 된다. 역사는 이 군중의 물결과 그것을 감싸는, 감싼다기보다 차라리 압도하는 거대한 기계구조들의 흐름이라는 두 개의 구조로 표상되어 있다.



전자가 서민이고 이야기라면 후자는 자본이고 도시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철갑과 근육과 대중문화산업, 그로테스크하고 압도적인 기계미학과 초과 상징들은 거의 노이즈 효과를 자아낼 지경으로 요란하고 과잉적이다. 이에 비하면 갑돌이들과 갑순이들은 작은 스케일의 평범한 군중들의 흐름이고 다소 정적이고 피동적인 느낌을 준다. 구조가 내용을 압도해서일지, 근육질의 상징들과 그로테스크로 요란한 이 만신전(萬神殿/ 이 표현은 백지숙의 글에서 빌려온 것임)의 어둠을 넘어선 시간의 의미가 안 느껴진다. 역사는 무의미의 야수-기계에 삼켜져 있다. 신학철의 작업에서 갑돌이와 갑순이는 아직은 시적 영역에 들지 않았다.





5.



신학철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충격의 언어다. 신학철의 콜라주 작업과 그 이후의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연작 속에서 억압자의 이미지는 전쟁 장비로 무장된 괴수로, 그로테스크한 기계-야수로 표현된다. 억압자는 군사독재정권이거나 신식국독자(신식민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거나 신자유주의경제 체제 또는 그것에 의해 일상화된 현대생활의 소외 그 자체이다. 신학철은 충돌하는 이미지들의 편성적 조립에 엄청난 공력을 들인다. 이미지들은 그로테스크한 볼륨으로 통합되면서 강력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학철이 표현하는 민중론적 상상계가 정치사 중심의 수난사로, 즉 정치적 압제와 민중의 수난이라는 구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학철의 작업이 정치사에서 민중사로 그리고 민중사에서 서민사로 점진적으로 변했다고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기조는 억압적 정치 권력 혹은 사회 체제와 민중과의 관계, 헤게모니적 정세 변화와 민중 권력의 (민중적, 민주적) 실현 문제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와 농촌, 자본과 노동, 식민자와 피식민자, 외세와 민족 간의 대립 구도는 그것의 변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예술적, 정치적 상상력의 주된 기둥이었다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조형어법이 매우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는 점이다. 일종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랄 수 있는데(이것은 주재환이 신학철을 평한 용어다) 그 핵심에 기계-야수, 그리고 남근적 에로티즘이 포괄되어 있다. 신학철 속에는 농촌 촌놈과 원시적 동물과 현대주의자가 동거한다. 야만적 에너지 같은 것, 동물적 저돌성과 단순성, 수사적 야로가 없는 것. 그리고 근육질적 공격성과 남성적 양기 같은 것 말이다. 이 기질적 영토의 한쪽 끝으로는 농촌적 순박성과 서정성이 있고 다른 쪽 끝으로는 무시무시하게 중성적인 기계전사의 살인 에너지 같은 것, 무장된 전투성, 남근적 공격성 같은 것이 있다(고 나는 상상한다).

        바람-5 그대의 초상(손), 1997, 캔버스에 유채, 122x200


여기서 신학철의 '눈'과 '근육'에 관해 잠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근육과 눈은 두 개의 강력한 원시적 기관이다. 이것은 야수와 기계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리고 남성성의 문제 내지 공격적이고 가학적인 에로티즘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학철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충격의 언어다. 일찍이 황지우는 신학철의 놀라운 시선의 초감각성을 '겹눈 같다'란 말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비동시적인 것이 동시적인 것으로 그의 눈에 비치는' 초감각성을 얘기한 것이고 이 겹눈 때문에 그의 시선이 닿는 사물들은 "기이하고, 그로테스크하고, 뒤죽박죽이고, 엉망이고, 흉측스럽고, 끔찍하고, 징그럽고, 불쾌하다. 한마디로 악마적이다" 라고 했다.



그것은 곧 이미지의 변형과 합성에 대한 그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주목이었는데, 그래서 그는 이 겹눈을 '무장된 시선'이라 불렀다(황지우 "겹눈을 가진 화가- 신학철의 '무장된 시선', 한길문학 1990.5). 잔인함, 공격성, 이미지의 충격적 효과는 기본적으로 여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충격의 방식은 매우 무겁고 비극적이고 괴물스럽다. 근육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군사적, 남근적이라 할 수도 있다. 근육의 원칙은 자지의 원칙으로 자주 드러난다. 경직과 팽창, 부풀어오르며 단단해지기, 블로우 업과 그로테스크, 그리고 강압적 성적 교접 등. 블로우 업과 그로테스크는 그의 중요한 감성적 표지이자 표현의 코드다. 블로우 업은 이미지의 꼼꼼한 사실적 재현(사진 이미지의 확대)으로 시작해서 그것의 꼼꼼한 재조립과 근육으로 뒤덮인 야수적 그로테스크로 마감된다. 「한국근대사5」 같은 작품에서 특히 드러나듯이 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공격적 구도는 남근적인 성적 폭압성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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