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영 /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연구원

정용훈은 1994년 이후 줄곧 특정 장소의 방문에 관한 기록들을 미술현장에 제시해 오고 있다. 그것은 사진과 함께 기록의 내용물들을 전시장에 진열하는 방식을 취한다. ｢시간의 질량」, ｢움직이는 바다｣, ｢공기 채집｣ 등은 정용훈의 방문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요약해 온 연작들이다.

최근 작업들은 국회의사당, 남산 1호 터널, 한강대교, 명동 등 서울의 특성을 잘 들어내는  지역에 관한 기록들에 집중되어 있다. ｢공기 채집」연작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 기록들은 정용훈이 서울의 어느 한 지역에 가서 그 곳의 공기를 표본병에다 담는 행위의 사실들을 증명한다. 자신이 머물렀던 장소의 장면을 찍은 사진, 그 장소의 기후 조건에 관한 정보들과 채집 일시, 그리고 공기가 담긴 표본병과 함께 이들을 전시장에 진열하는 것으로 정용훈의 작업은 마무리된다.

정용훈, 공기채집, 1996. 5, 사진, 표본병과 혼합재료

박물관의 진열장이 유물이나 미술품을 보이기 위한 기능과 관습이라면 표본병은 자연 과학적 실험의 결과들을 오래도록 보존하고 진열하기 위한 용도의 관습을 갖는다. 이 점은 조각의 좌대(座臺)가 전시 공간에 제시되는 기능과 같은 관습적 근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습에 견주어 정용훈은 미술의 관습이나 기능과는 거리가 있는 새로운 틀로 미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일 법하다.

회화에서 진열장이나 표본병 혹은 조각의 좌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액자를 꼽을 수 있다. 회화가 액자 없이 걸릴 때 회화는 하나의 공예품으로 전락될 위험을 갖는다. 왜냐하면 칠되지 않은 캔버스의 옆면에 뚜렷이 박혀 있는 못 자국과 같은 실재하는 현실의 조건은 회화의 영역을 보증하는 평면의 의미를 파괴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설치 미술은 바로 못 자국이 없는 사각형의 빈 화면을 액자 없이 화랑 벽면에 제시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정용훈의 설치 작업들은 결국 미술의 관습적 틀들에 대한 의존을 피하기 위해 미술 이외의 틀을 빌려 온 것일까?

도판 1  정용훈, 시간의 질량-퇴적, 1994, 사진 위에 혼합재료, 90x180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용훈의 설치물들은 새로운 것도 미술도 아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상의 나열이 되고 만다. 여기에서 나는 정용훈의 표본병을 다시금 유심히 바라본다.

회화의 틀(즉, 액자), 조각의 좌대 그리고 박물관의 진열장, 심지어 상점의 진열장마저도 일상과 특정 영역간의 경계로 작용한다. 가령 옷가게의 쇼 윈도우는 그 앞을 서성이는 한 소녀로 하여금 그 안의 옷과 자신이 걸친 옷의 비교를 야기한다. 이 비교는 곧 그 소녀의 환경과 진열장이 포함하는 환경과의 차이를 나타낸다. 소녀는 쇼윈도우의 마네킹이 걸친 옷의 디자인과 제질 그리고 색감을 관찰할 것이고 이내 자신의 몸에 맞을 것인가 어울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진열장의 옷은 그 소녀의 일상과 변별되는 특질(quality)을 획득하게 된다. 즉, 소녀가 바라본 옷의 형식적 외관(옷의 디자인, 제질, 색감 등)이 “맞을 것인가 어울릴 것인”라는 소녀의 마음에 겨냥되기 때문이다. 쇼 윈도우는 바로 소녀의 미적 판단을 유발하는 구체물인 셈이다.

따라서 관습적이고 기능적인 틀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일상과 특정 영역(특히, 미술)을 비교하게 하고 이들 간의 간극을 초래함으로써 특정 대상(특히, 미술품)에 순고한 마음을 부여하는 관습이 되어 왔다. 정용훈의 표본병은 그런 의미에서 분명 전시장을 서성이는 관람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자극할 비교나 차이를 유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 과학의 관습과 기능에 연관된 틀이라고 할 수 있는 표본병은 관람자들에게 그들의 일상과 다른 마음을 유발할 것이다.

도판 2       정용훈, 움직이는 바다, 1995, 사진과 혼합재료

바로 이러한 점들에서 나는 정용훈의 표본병이 미술의 관습에 대한 개별 미술가의 미묘한 반응일 것이라 가정한다. 그 것은 듀상(Marcel Duchamp,1887-1968)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듀상이야말로 액자나 좌대 없는 미술을 세상에 내놓았던 미니멀 미술(Minimal Art)에 대해 50년이나 앞서 미술의 상점에서 진열장을 파괴한 장본인이다. 듀상은 일상과 똑같은 변기를 아무런 장치나 틀 없이 미술계에 제시함으로써 당시의 현대 미술은 영역에 대한 치명적인 도전을 받았다. 바꾸어 말해서 듀상은 마네킹도 아닌 맨몸으로 진열장을 너머 소녀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옷가게의 주인 꼴이었고, 듀상의 관람자들은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 곤경에 처한 소녀와 같았다.

오늘날 그 도전은 이미 미술의 또 다른 관습으로 당연시되고 있다. 진열장이 없어도 길가는 소녀의 눈길을 끌도록 하는 민속촌의 난전이 존속하듯이 미술의 틀을 없앤 그 자체가 미술관에 포함되었다. 더 이상 미술의 틀을 제거할 것이 없는 종착지 그리고 마음이나 미적 판단마저 첨예하게 단위화되고 정보화된 오늘날의 환경에서 정용훈의 표본병 앞에 있는 관람자는 과거 듀상의 관람자와 다르고 이미 듀상 류(類)의 충격에 예방 접종되어 있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정용훈의 표본병은 옷을 구경하는 소녀 앞에 옷의 진열장이 아닌 전자제품 진열장(혹은, 정육점의 진열장이든 여타의 용도를 위한 아무거나)에 담긴 옷을 보이는 것과 같다. 즉, 정용훈의 미술에서 틀(진열장)은 무엇이 되든 미술외적인 한, 최소한의 한정으로 존재하고 미술의 관습을 온건하게 재고토록 한다.

관람자와 미술가가 공유하는 현실에 실재하는 생활 세계와 정용훈의 미술 사이에는 여전히 최소한의 절연 상태가 남아 있다. 표본병은 바로 그 간극을 구성하는 투명하고 깨어지기 쉬운 유리막으로 정용훈의 체험들을 담고 있다. 나는 여기서 그 표본병의 특질을 밝히기 위해 정용훈의 보다 먼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야 한다.

1994년에 제작된 정용훈의 「시간의 질량 - 퇴적」(도판 1)에서 표본병의 역할을 직사각형의 육중하고 둔탁한 틀이 하고 있다. 사진은 그 자체로 일상의 대상물이다. 사진은 기능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일상에서 떳떳하기에 액자가 없어도 사신의 고유한 영역이 파괴되지 않는다. 사진에 틀을 두르면 이미 그 표면의 균일한 특질이 회화의 관습에 의해 깊이의 공간으로 판독된다.

도판 3  정용훈, 기관, 1996, TV부속, 병, 기름

이 초기의 작품에는 사진의 표면에다 미술가의 제스츄어를 나타내는 얼룩들과 휘갈김마저 남김으로써 이 사실을 더욱 보증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진의 특질이 회화의 특질로 전환됨을 목격할 수 있다. 따라서 ｢도판 1｣에서 틀은 고전적 회화의 관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대상 파괴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일 법하다. 달리 말해서 이것은 바로 듀상류의 실재하는 등가물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진다.

그런가하면 사진의 물질적 대상성을 유발하는 매끈한 표면과 함께 액자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입체적 면들을 액자는 또한 하나의 통합된 대상물로 판독되게 한다. 이 때 ｢도판 1｣의 사진이 품고 있는 내용물들은 사물에 대한 재현으로서보다 특정 장소와 특정 시간에 순간적으로 촬영된 사진 장식물의 등가물을 구성한다. 따라서 초기작의 틀에서 우리는 상이한 성격을 동시에 유발하는 애매함을 접하게 된다.

고전적 의미에서 회화의 틀은 관람자의 실재하는 영역과 회화 공간간의 영역이 교차하는 테두리의 다의성을 제거하기 위해 건물의 문틀이나 창틀과 같은 기능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둔탁한 틀의 채용에도 불구하고 야기되는 초기에 제작된 정용훈의 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나는 바로 이 점에서 최근작의 표본병이 갖는 틀의 역할과 공유되는 특성을 발견한다. 초기의 것과 지속된 일관성은 정용훈의 행위나 경험들을 한정하는 최소한의 경계로 판독된다. 작년에 발표된 「움직이는 바다」(도판 2)에서 세 가지 틀이 각기 다른 내용과 형태로 동시에 진열되었다. 사진의 틀, 유리관 그리고 표본병, 이것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채집된 것들이다. 여기서 사진틀들의 의미는 사진의 화면과 함께 구성된 총체적 대상물로서 나머지 대상물(유리관들과 표본병들)과 대등한 지위로 전시 공간을 구성한다. 여기서 나는 정용훈의 틀들이 갖고 있는 변형이나 다의성은 개별 기록들의 독립성을 보증하는 역할함을 발견한다.

최근작 ｢기관｣(도판 3)에서 표본병 뚜껑을 조금 열어 둠으로써 표본병이 갖는 틀의 의미를 유연하게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표본병의 투명함과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둔탁하고 견고한 유리 상자간의 대비가 지금까지 정용훈의 틀이 유지해 온 애매성을 파괴할 염려가 있다. 표본병의 뚜껑을 조금 열어 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염려를 상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시간의 질량｣, ｢움직이는 바다｣ 그리고 ｢기관｣, 이 연작들에서 일관된 틀의 특성으로 양자택일적인 다의성 혹은 애매함에 주목한다.

정용훈, 공기채집, 1996. 3. 27.  16:30, 서울 낙산

듀상의 사례에서 보듯이 틀의 파괴와 공간의 개방을 매체로 삼고 있는 절치 미술의 관습에서 정용훈이 유지하고 있는 일상과의 절연 상태는 보다 포괄적 의미에서 볼 것이 요청된다. 초기작에서부터 유지되어 온 애매성이 전시장 공간 전체로나 작품과 어느 정도 먼 거리에서 바라 볼 때 이 애매성은 확연한 단절의 의미로 다가온다. 즉, 애매성을 갖고 있는 정용훈의 틀의 특질은 상이한 영역들간의 관계를 현실에 구체화하는 방식일 때 감지된다.

미술가의 일상이나 과거의 특정 장소에서의 체험과 전시장의 관람자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간의 틈을 인정하는 정용훈의 표본병은 바로 지나간 과거를 담는 장치이다. 정용훈이 목격했던 “그때 거기”는 “지금 여기”와 이미 달라졌을 것이고 표본병의 공기도 달라진다. 상이한 환경들간의 절연에도 불구하고 그 장치의 애매성은 과거의 사실을 그리고 거기의 사실을 지금 우리의 현실에 복구시키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때 거기”를 “지금 여기”에 변형하는 것은 미술이 존재하는 한, 계속 지속될 것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