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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미술 현장의 동향과 평가 / 미술 감상 안내   
그림에 취한 신선, 오원 장승업: 취화선(醉畵仙)


전수경   /   2007. 8. 1.
 

그림에 취한 신선, 오원 장승업

               취화선(醉畵仙)


전수경, 화가



같은 영화를 여러번 보게 되는 일이 있다. 대학시절 데이트 상대에게 미리 봤다는 사실을 차마 말 못하고 한 영화를 3번씩 봤던 것이 기억난다. <사랑과 영혼> 그리고 <귀여운 여인>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외에 특별히 감명 깊은 영화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집에서 종종 다시 본다. 이 때 오직 영화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마음껏 음미할 혼자만의 시간이 보장된다.

            <취화선>의 포스터
<취화선(醉畵仙)>이 2002년 5월 개봉되자 마자 나는 이 영화를 상영관에서 봤다. 그 뒤 나는 대학에서 내가 맡은 한국 미술사 수업에 그것을 교재로 활용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그 영화를 학기말까지 4번씩이나 더봤다.


<취화선>의 제목을 글자 그대로 풀면 “그림에 취한 신선” 혹은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신선”이된다. 이 신선은 곧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을 가르킨다.  애주가인 장승업은 흥이 동해야만 그림을 그렸고 술이 떨어지면 결코 붓을 들지 않았단다. 안견(安堅, ?~?, 세종조에 활동), 김홍도(金弘道, 1745~?), 정선(鄭敾,1676 ~ 1759) 등과

     장승업,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19세기, 견본담채, 152x69, 간송미술관
함께 조선화단의 4대 거장으로 꼽히는 장승업은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꽃 피운 화가이다. 그는 이후 전개 되는 한국 근대회화의 토대를 이루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장승업은 일본 제국주의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점철되는 과도기의 절박한 시대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불살랐다. 이 영화가 분명 사극이지만 단지 미술가 개인의 삶과 그의 예술을 조명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미술의 여러 유형들과 음악, 풍속 및 풍류 등을 통해 500년의 조선 문화의 전통을 마감하는 시대적 상황을 다채롭게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중인 출신의 화가의 시각과 사대부 중심의 가치관 사이의 충돌과 대비를 통해 계급적 갈등에 처한 개인의 반응을 진지하게 그리고 한편 냉소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종합예술로서 영화가 지닌 요소들이 <취화선>에 골고루 포함되어 있기에 나는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교육적 자료로 그것을 기꺼이 선택하게 하였다. 또한 이렇듯 총체적으로 묘사된 동양문화, 우리전통의 미학과 정서의 은근하고도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칸 영화제라는 서구 유럽인들이 주축이 된 국제영화제에서 큰 주목을 받고 어필하게 된 결과를 가져 온 것이 아닐까.



스크린에 스며드는 먹과 붓


임권택 감독의 98번째 작품이 되었던 <취화선>은 영화계 뿐 아니라, 국내 미술계의 많은 인사들의 참여와 자문을 통해 완성도와 질을 한층 높이게 되었다.

도올 김용옥, 서울대학교 박물관 이종상 관장, 서예가 박원규 선생 등 국내 최고의 화가, 이론가의 면밀한 검토와 자문을 통하여 주인공 오원의 그림 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겸재 정선의 그림을 비롯한 명화와 조선시대의 민화, 각종 고사도, 중국화 등의 다양한 화제와 기법의 그림들이 스크린에 당당히 펼쳐지고 있다.


장승업 역을 맡은 최민식도 오원 특유의 생동하는 강한 필력을 연기하기 위해 일찍이 촬영 전부터 중앙대학교의 김선두 교수에게 먹 갈기와 집필법과 자세 등 한국화 수업을 꾸준히 받아왔다고 한다. 또한 주목할 점은 종이 위를 스치며 운필하는 모필의 기운을 꽤 사실적으로 화면에 옮겨내고 있다는 것이다. 종이를 마찰하며 빠르고 느리게 운행하는 화가의 붓과 팔, 화선지에 닿는 순간 스며들어 번져가는 수묵화 고유의 표현기법을 마치 화가 옆에서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듯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동양화의 재료자체가 갖는 예민한 특성은 서양의 캔버스와 브러시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고조된 긴장감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감독은 전작인 <서편제>, <춘향뎐> 등에서 이미 우리나라 자연의 유려한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작업을  해온 바 있다. 그 중 이번 <취화선>의 촬영 컨셉은 기울어져하는 국운을 암시하는 우리자연의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장승업의 연대별 유랑 길 장면에서 엿볼 수 있다. 경주 양동마을, 제천 갈대 숲, 석모도, 동강, 영종도, 뱀사골 등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는 한국의 풍광을 담은 실경 산수화와 풍속화를 한 점 한 점 넘겨보듯 파노라마가 전개되고 있다. 더불어 그 영상 뒤로 흐르는 <이별가>, <흥타령> 등의 우리소리는 그 애틋하고 처연한 운치를 더해 입체적으로 눈과 귀에 그 인상을 아로새기고 있다.

   장승업, <쌍치도(雙雉圖)>
   19세기 후반, 지본담채, 135.5x55.3
    호암미술관



시놉시스와 오원의 명작


 

19세기 중엽, 청계천 거지 소굴에서 패거리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던 어린 승업을 우연히 길을 지나던 김 선비(안성기 분)가 구해준다. 승업은 자신이 맞게 된 내력을 그림으로 그려 보인다. 첫눈에 승업의 비범한 재능을 발견한 김 선비는 승업을 한양의 역관 이응헌에게 소개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이상적의 사위이며 청나라를 왕래하던 역관으로 중국 원, 명 이래의 이름난 사람의 그림과 글씨를 수집해 오던 이응헌의 집에는 많은 화가들이 모여들어 그림감상을 하곤 하였다. 승업은 이응헌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어깨너머로 유명 화가, 수장가들의 화첩을 훔쳐보며 틈틈이 그림그리기에 몰두하게 된다.  귀신같은 눈썰미와 배우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먹과 붓을 다뤄내는 천부적 재능으로 곧 장안에 화명을 얻게 된다.

 

<취화선>에서는 3명의 장승업의 여인이 등장한다. 장승업은 술 못지않게 여색을 밝혔다고 한다. 미인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취중에 그리는 것을 즐겼던 그는 기록에 의하면 천성이 한 여인에게 머물지 못하여 결혼한 첫날밤을 치루고 그길로 떠나 평생을 방랑하며 지냈다고 한다. 승업의 첫사랑으로 등장한 여인은 소운(손예진 분)이다. 그는 이응헌의 여동생 소운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결국 신분의 차이와 소운의 결혼으로 좌절하게 된다. 이후 화가로서 자리를 잡아나가던 중, 병을 앓던 소운이 죽어가며 자신의 그림을 청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 아픈 재회를 하게 된다.


두 번째 여인은 몰락한 양반가문의 딸인 기생 매향(유호정 분)이다. 매향은 이 영화에서 승업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유일한 여성으로 그려졌다. 승업의 그림에 제발을 써 넣으며 인연을 맺어나간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매향과는 천주교 박해로 두 번의 이별과 재회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집에 동거했던 진홍(김여진 분)이라는 무지한 여인네가 등장한다. 이 여인과 헤어지며 위자료를 겸하여 앞마당에 큰 종이를 펼쳐놓고 단숨에 그려준 매화그림이 아마도 장승업의 그 유명한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도판 1)이리라. 임권택 감독은 영화제작 전, 호암 미술관에서 맞닥뜨린 이 붉고 흰 매화그림 10폭 병풍 앞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거대한 힘과 기운을 느꼈다고 한다.

도판 1  장승업,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 水墨淡彩 90.0×433.5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승업을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하던 동자에게 그려준 두 마리의 매 그림 또한 오원의 대표작이다. 일명《호취도(豪鷲圖)》(도판 2)로 불리는 이 그림에 보이는 붓놀림은 계산되지 않은 오원 특유의 즉흥적이고 호방한 필치와 기질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매는 금방이라도 주시한 곳을 향해 날아갈 기세이고, 발묵법을 사용하여 빠르게 그려나간 나뭇가지에선 제작의 속도를 감지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 이 《호취도》에 깊은 감화를 받은 일본인이 중년의 오원을 찾아와서 작품을 의뢰하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어 이 작품은 영화의 구성상 주요단서가 되기도 한다.



화가와 술, 광기


‘술 중에 최고의 술이 예술’이라는 말이 있듯이 많은 예술가, 화가들이 술과 친하다. 장승업은 또한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별호를 가질 정도로 술을 좋아하여 그의 소맷자락 안에는 늘 술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생애를 요약하면 술과 방랑, 창작에의 광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생사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도판 2        장승업, 호취도
평생을 그의 그림을 구하는 이들의 사랑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인생과 예술을 기운 생동하는 그림으로 쏟아내곤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뜬 구름 같은 인생을 보냈다.


오원의 명성이 궁중에 까지 들리자, 한 때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도화서에 속하여 벼슬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임금의 부름도 영광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로운 창작에 구속으로 다가와 그 자리를 스스로 뿌리치고 궁궐에서 도망쳐 나오게 된다. 세상의 어느 누가 뭐라 해도 스스로 흥과 신명이 동하지 않으면 결코 붓을 들지 않는 그의 고집과 기질은 회화사에서도 유명하다. 더구나 하루에 두 세잔의 술만을 허락한 왕실을 견디지 못한 오원은 여러 차례 꾀를 써서 문지기를 속이고 탈출을 감행하였다.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와 법도는 그에게 있어서는 하찮은 것이었고, 오히려 예술과 창작의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이 전부였다.


‘술이란 세속적인 흥취보다도 도연히 취하는 가운데서 예술에 대한 정열은 더 뜨거워질 수 있고, 기개는 더 호방해져서 부지불식간에 생각지 않은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술에 의해 예술적 소지를 기를 수도 있고 또 감흥을 얻을 수 있다.’ 는 미술이론가 김용준의 수필의 글이 떠오른다. 오원 이외에도 조선시대에는 술을 좋아했던 많은 화가들이 있다.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은 한 번에 몇 말의 술을 마셨다고 하며, 자기 눈을 찌른 괴짜화가 최북은 주광(酒狂)이라 불렸다. 술병으로 30세 나이에 요절한 두주불사 이정이라는 화가도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라크루아는 ‘알코올과 예술가’라는 책에서 술의 부화기능에 대하여 표현주의 필치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 등을 사례로 들기도 하였다. 그는 작가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매몰된 기억들과 문장을 솟아오르게 하는데 있어서 연료 부족에 기관이 정지된 상태에 처 한다면 신을 향해 기도하기보다 새 술병을 딸 것이라고 하였다. 최근 금연운동은 가속화되어도 금주에 관한 것은 여전히 개인적인 주량과 체질로 간주한다. 과음은 독이 될 수 있겠지만 즐기는 술은 역시 ‘약주’가 될 수 있나보다.



“나도 원(園)이다”


“세상이 나를 뭐라하든... 나는 나! 장승업이오”라는 영화의 메인 카피가 말해주듯이, 이 영화에서는 돈과 명예, 권위와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홀로 평생을 자기 자신과 싸우며 예술혼을 불사르고 간 화가 장승업, 아니 인간 장승업으로서의 ‘치열한 생’을 그리고자 하였다.


오원이 활동하던 시기는 추사 김정희 이래로 선비사상과 서권기(書卷氣)에서 비롯된 고격한 정신세계가 회화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강조 되었다. 천한 출신에다 무학의 오원은 글을 배우지 못하여 비록 자신의 그림에 손수 제발을 써넣을 수조차 없었으나, 그림 자체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은 누구 못 지 않았다.

그는 조선후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으로 오원(吾園)으로 삼았다고 한다. 영화 곳곳에서 유교적 양반우월주의에 대한 화가로서의 고뇌와 갈등이 여실히 묘사되고 있다. 어느 시대이건 그 시대의 주류가 되는 사상과 집단에 대한 모순과 반항은 특히 예술가에게 있어 필연적이다.


장승업이 걸출한 화가임에는 모두가 이견이 없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냉소적이고 부정정인 해석 또한 있다. 소위 ‘한국화의 새 경지를 보여준 화가는 아니다. 회화의 격조보다는 자신의 기량에 충실한 장인이다. 중국화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라는 등의 장승업에 대한 지적은 이미 공공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감독의 말대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갖고 치열하게 살아나간 삶’을 그린 인간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치열한 생 자체가 예술이 지향하는 세계만큼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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