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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미술 현장의 동향과 평가 / 미술 감상 안내   
표현주의의 칠


학예기획실   /   2004. 5. 3.
 

표현주의의 칠


이희영 / 미술평론가, 한동대학교 기초학부 강사
 

최근 미술대학 이외의 교육기관들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미술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수강생들 중 일부는 교육과정을 마치자마자 미술현장에 작품을 직접 발표하거나 미술 대학원에 진학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심지어 미술대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미술가의 시기심을 자극 할 정도로 많은 전시회와 진학의 사례들을 보이고 있다. 문화센터와 같은 곳에서 짧은 기간에 회화의 수련을 가진 사람들을 일요화가나 취미생 정도로 보기에는 이들의 활동이 최근 부쩍 눈에 띠고 전문 미술가들의 활동과 얼핏 그 외양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들이 짧은 시간에 현대미술의 중요한 양식을 소화한 듯한 작품으로 미술현장에 뛰어 드는 자신감은 적어도 현대미술의 한 가지 속성을 화면에서 이룩하기 때문으로 보인이다. 그 양식은 현대미술사의 전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자유와 개인주의로 향한 혁신들과 연관이 있는 추상의 실현이다. 이들은 사물의 재현에 필요한 고된 훈련 대신 심상의 재현을 위해 화면에서 형태를 지우거나 칠에 전적으로 의존해 그림으로써 그럴 뜻한 현대 미술의 한 지점에 짧은 시간에 도달하는 듯하다.
 
Emil Nolde
Piazza San Dominico II, Taormina, 1905, Olil on canvas, 41x51.5, Kunstmuseum, Dusseldorf

이들의 자신감이 오늘날 미술현장에서 정당화되는 구체적 징후를 나는 우라나라의 현대미술사에서 이해되는 표현주의에서 찾는다. 특히 표현주의를 가능케 하는 구체적 매체(media)가 칠(paint)인 것에 주목하여 1910년대에 활동한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이룩된 칠의 속성(the painterly)과 시대적 역할을 돌아봄으로써 표현주의(Expressionism)에 대한 우리나라 미술현장의 오해를 지적하고자 한다.





I.


1980년대의 한국미술에 뚜렷한 한 가지 특징을 구성했던 민중미술이 1994년 “민중미술 15년전”이란 제목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되었을 때 이전시회에 대해 “민중미술은 제도로부터 당당한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그것의 장례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제도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채 저항하는 아방가르드의 모습으로 민중미술이 이해됨을 말한다. 민중미술가들은 1960∼'70년대를 주도한 한국현대미술의 주도적 미학에 대항하고 삶의 진실성에 관심을 가졌다.

    이철수, 한반도, 1984, 천에 목판화, 각각123x62

이들이 거부한 것은 아름답다고 통념적으로 간주되는 대상의 재현에 의존한 미술과 시각적 순수성을 실현한다고 믿는 추상미술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소시민과 민초들의 삶을 매끈하고 평평한 단색조의 고상함이 아닌 투박하고 거친 칠로 자신의 캔버스를 매웠다. 기존 제도에 대한 이들의 구체적 저항 방법은 칠을 통해서이었다.


1950년대 말에는 한국전쟁 중에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한 세대들에 의해 뜨거운 추상운동이 현대미술협회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전쟁을 통해 인위적인 모든 작위의 허망함을 주목하고 오직 개인의 혼돈스런 내면과 본능의 소리를 생생하게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과 10년 앞서서 이미 유럽에서 2차대전의 경험을 혈흔, 붕대의 질감, 살점과 같은 물리적 속성을 유발하는 광폭한 칠를 통해 미술가의 감정을 표현했던 앵포르멜(Informal) 운동에 공감하고 스스로 한국의 앵포르멜 운동을 실천하고자 했다.

    박서보, 자화상, 1957, 캔버스에 유채


1930년대는 1915년 일본에서 유화를 배우고 돌아온 고희동을 이은 세대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이다. 이 때 제작된 대부분의 회화들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서양회화의 사조와 평행하고 있다. 구본웅이 대상을 화면에 간략하고 단순하게 도입하면서 그 표면을 점액질이 흘러내리는 칠의 속성으로 식민지인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인성, 오지호의 인상주의적 화면과 이중섭의 상징주의적 회화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한다. 이들은 당시 한국의 토속적 표현을 목적으로 푸른 하늘과 민둥산의 붉은 흙을 짙은 원색으로 두텁게 칠했다.


칠은 우리나라 현대회화사에서 중요한 혁신의 시기에 회화의 우세한 매체로 채택되어 왔다. 그것은 또한 미술가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칠은 1980년대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실현하기 위한 저항의 형식으로, 1950년대 말에는 동족상전에 의한 인간성의 상실에 대한 위기감의 표출을 위해, 그리고 항일투쟁기에는 식민지인의 비애와 향토적 감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미술에 적용되었다.

     이인성, 복숭아, 1939, 캔버스에 유채, 91x117
이는 또한 우리나라의 서양미술 수용과 변형과정에 중요한 맥락을 구성하는 것으로 감지된다. 이 과정을 크게 요약하면 칠은 먼저 서양화의 도입에, 동란 이후 서구의 앞선 현대미술과의 동참에, 그리고 1980년대에는 내부에 대한 자발적 각성에 각각 연관되어 보인다.  



II.


서양 미술사에서 표현주의란 양식이 등장하게 된 것은 1910년과 11년 사이이다. 1914년 파울 페히터는 자신의 저작 <표현주의>에서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에 반대한 독일 미술”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저작이 나오기 전까지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에 반대하는 유럽의 모든 미술에 다 적용되었다. 지금은 표현주의와 엄격히 구분되지만 마티스(야수파), 피카소 및 블라크(입체파), 그리고 미래주의자들 까지 모두 표현주의로 칭했다.
Henri Marisse, Le bonheur de vivre (The Joy of Life) , 1905-06, Oil on canvas, 175 x 241; Barnes Foundation, Merion, PA
미술사에서 통상적으로 이 페히터의 정의를 따른다. 1912년 쾰른에서 열린 "특별연합전"의 도록에 의하면 표현주의는 표현형태를 단순화 그리고 강화시켜 새로운 리듬과 화려한 색채를 획득하고 장식적이거나 기념비적인 형태들을 창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표현주의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들은 외향은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불변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고 봤다. 표현주의자들은 바로 이 너머의 세계를 그리려 했다. 그것을 이들은 본질이라고 했다. 표현주의자의 한 사람인 칸딘스키는  이를 “내적 본질”, “내적 울림”, 그리고 “내면의 소리”라고 한다. 따라서 표현주의는 서양의 문화사를 계속 이어주는 이원론 즉, 물질과 정신을 분리시키는 것의 극단적 반영으로 볼 수 있다.

Wassily Kandinsky, Composition VI, 1913, oil on canvas, Hermitage, St. Petersburg


르네상스 이래 서양미술의 주도적 양식이 사실주의로 볼 때 인상주의는 바로 표현주의자들이 극복해야할 사실주의의 극단에 위치한다. 인상주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망막에 매쳐서 경험되는 그 사실만을 기록한다. 인상주의자 클로드 모네는 수면과 수련에 반사되는 빛의 프리즘을 기록했다. 심지어 루앙 대성당을 시간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작품을 달리 제작한다. 이는 바로 겉모습에 관한 시각적 기록이자 순간의 포착이다. 이에 반해 표현주의자들은 불변하고 근본적인 것을 물감을 통해서 표현해야한다 라고 특별연합전 도록에서 쓰고 있다.

      Claude Monet, Water Lilies (The Clouds), 1903
                            Oil on canvas, 74.6 x 105.3


프랑스의 야수파가 칠의 순수성을 캔버스에 실현하는 것에서 그리고 인상주의를 극복하는 점에서 독일의 표현주의와 유사해 보이지만 독일 표현주의자들은 마티스 류(類)의 야수파와 자신들을 구별한다. 독일 표현주의자들은 야수파의 칠이 조화와 아름다움에 매여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 재현 대상이 주로 춤추거나 노래하는 삶의 즐거운 장면들인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도전에 맞선 개인의 고통과 삶의 덧없음을 무시한 채 단지 아름다워야 한다는 미술의 이념에 대한 거부이다. 즉 이들 표현주의자는 부르주아의 기만을 거부한 것이다.


개인 내면의 본질로부터 울려 나오는 음향에 반응하고 사회적 기만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이들은 목표로 삼았다.

   Ernst Ludwig Kirchner, The Red Tower in 
       Halle
, 1915, Oil on canvas, 120x91
       Fokwang Museum, Essen
건축학도였던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다리파(Die Brücke)를 결성하고 도시인의 시각이 아닌 자연인의 시각으로 환경을 자신의 화면에 재현했다. 그의 화면에서 도시는 근대적 부를 누리는 인상주의자들의 장면과 달리 불안하고 뒤틀리게 표현된다. 키르히너는 일그러지거나 다양한 시점으로 화면을 전개시킴으로써 르네상스 이래 발전해온 단일시점의 원근법을 피하고 또한 마티스의 화면에서처럼 관람자에게 안정감을 주는 평면감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키르히너의 칠은 조화와는 상관없는 극단적 대비의 색과 거친 붓 자국으로 미술가의 몸짓을 그대로 기록하는 칠을 남겼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1911년 뮌헨에서 청기사파(Die Blaue Reiter)를 조직하고 다리파(Die Brucke, 1871~1914)를 비롯한 인상주에 대한 뚜렷한 반응을 보인 프랑스의 루소, 피카소, 브라크 등과 교류하면서 현실 중심의 유물론과 사실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회화에서 재현 대상이 없는 화면에 도달하는 실천으로 나타났다.

       Wassily Kandinsky, composition IV, 1911
                                       404x639
결국 1913년에 소위 최초의 추상회화를 제작하게 된다. 이는 현실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 칠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음향을 기록한 결과이다. 이 화면 앞에 선 관람자는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의 대상과의 유사성을 그 안에서 찾지 못하고 오직 미술가의 몸짓과 색채만이 있는 얼룩과 같은 형태만 보게 된다. 이 형태들은 그것이 생겨나게 된 원인인 미술가의 내면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이들의 활동은 인상주의 이후 인상주의에 대한 반응 혹은 반작용으로 나타난 고흐, 고갱, 뭉크, 앵소르 등의 형태왜곡으로부터 형식적 영향을 받고 있다. 키르히너와 칸딘스키를 포함하는 표현주의자들은, 그들이 한결같이 대상의 유사성을 극대화하는 것에 칠을 쓰지 않고 미술가 자신의 마음을 대리하는 것에 칠을 쓴 것에 주목했다. 그와 함께 이들의 활동은 청기사파나 다리파에 가담하지 않고 1차대전 이후 개별적으로 이들의 반브루즈와적 아이디어를 회화로 실천하는 표현주의 2세대에게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키르히너나 칸딘스키가 현실의 재현을 가급적 피하려 했던 것에 비해 현실에 대한 왜곡된 형태를 극대화함과 동시에 재현된 표현을 이끌어 갔다. 현대의 순수한 추상회화의 전개에 이들 표현주의자들이 이룩한 칠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실에서 목격되는 사물에 대한 재현의 부담이 표현주의자들에 의해 재거된 바탕에서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표현주의의 칠은 과거를 복구 혹은 극복함과 동시에 다음 시대의 미술을 연 것으로 볼 수 있다.


잘 그려진 사과의 이미지는 관람자에게 사과로 판독된다. 하지만 사과로 재현된 그 이미지의 구체적 현실은 물감 덩어리라는 칠일 따름이다. 칠은 그 자체 물리적 영역이고 매체에 불과하다. 르네상스 이래 추구되어온 진실이 표현주의자들에 의해 허구로 주장된다.
오지호, 남향집, 1935, 캔버스에 유채, 79x64, 국립현대미술관
하지만 표현주의자들은 온전히 매체의 물리적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쓰는 칠이 재현될 수 없는 대상 즉, 내면을 재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표현주의의 아이러니가 목격된다. 순수한 본질을 재현하고자 했지 순수한 그 실체를 미술에 구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진실의 추구는 표현주의 이후 서양미술사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완전한 실체를 구현한 지점에서 미술가들은 항상 곤경에 처해왔다. 표현주의의 칠은 미술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는 극명한 아이러니 즉, 칠의 물리적 속성 그 자체가 진실인가 아니면 칠 넘어의 이미지가 진실인가 하는 난제를 제공한다.





IV.


1930년대 오지호의 “남향집”, 이중섭의 “소” 그리고 이인성의 인물화들은 분명 한국적인 것을 생각했을 때 합당해 보이는 시각적 믿음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중섭, 소, 홍익대학교
더욱이 그 각각의 이미지를 이루는 칠은 한국의 토담, 역동하는 토종 가축의 근육, 그리고 다소곳하고 풋풋한 한국의 처녀를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이룩한 칠은 일본의 현대미술에 대한 끊임없는 곁눈길의 결과이다. 이중섭과 이인성이 고국에 있으면서 일본의 동무로부터 전해 받는 서신을 천연색으로 인쇄된 엽서로 받으려고 했다. 그 엽서에는 해마다 열린 일본의 주요 전시회의 수상작이 천연색으로 실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칠이 의존하고 있는 또 다른 토속적 특성의 근원은 당시 일본이 대한반도에 대해 일본을 본토로 하는 지방의 개념으로 간주하고 추진한 향토색 장려운동에서 비롯된다. 이는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앙정부가 지방인 제주도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제주도의 토속성을 강조하는 것과 같다.

이인성, 가을 어느날, 1934, 캔버스에 유채, 96x161
            호암미술관
이들이 채용한 표현주의적 칠은 결국 우리나라 양화(洋畵) 도입기에 이미지 정보와 이념을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그대로 논증하는 셈이다.


1958년 한국 앵포르멜 운동의 모체인 현대미술협회의 제 4회전 도록에는 “...기성체제의 모든 합리주의적 도화극을 박차고... ”라는 난해한 선언이 있다. 동족간의 전쟁을 격을 정도의 환경에서 이들이 극복해야할 합리주의가 이 땅에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일본의 현대미술과 더 나아가 유럽의 미술에 대한 정보에 굶주려 있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세대 중 몇몇이 <미술수첩>과 같은 일본의 미술전문지에 집착했던 것에서 보듯이 이들이 광폭하고 순수한 몸짓으로 화면에 물감을 붇는 행위를 내부에서 울려오는 순수한 내면의 것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60년미술가협회전, 1960. 10. 7. 덕수궁 북쪽 돌담
이들이 당시 성취한 추상에는 온전한 추상에 도달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앵포르멜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연상하지 못한 채 칠로 화면을 뒤덮었지만 앞 뒤 상 하 좌 우가 구별되거나 인본주의적 체취를 남김으로써 결국 대부분 연상이 유발되는 서술적 설명으로 치장되곤 했다. 여기에서 칠은 표현주의가 버리지 못한 서술을 남김으로서 그것의 발생으로부터 충분한 시간이 되었음에도 그것을 능가하는 양식을 창출하지 못했음이 확인된다.


1980년대를 특징짓는 민중미술에 표현주의의 영향은 독일 표현주의 2세대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순수한 추상이 갖는 숭고함을 거부하고 현실을 미술이 그대로 대리할 것에 대한 민중미술의 기대는 표현주의 1세대가 지닌 아이러니와 애매함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중미술가들은 고통 받은 현실의 환경을 재현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황재형, 연탄찍기, 1986, 창틀, 철망에 지토, 
               92.5x59
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인상주의자와 같은 표면적 사실이 아니라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가능한 것은 개인적 성찰과 함께 환경의 인식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양식적 지속과 새로운 창출을 이룩해 보이지 못한 민중미술은 짧은 한 십년대의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속에 보기 드물게 자발적 각성이 미술내부에서 목격된다.






독일 표현주의의 칠이 지닌 아이러니는 이후 현대미술의 전개에 각성의 구체적 조건이 되었고 지금까지 그 문제로 현대미술은 분투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표현주의적 칠은 서술적 연상에 기여하는 것으로 앞에서 살폈다. 항일투쟁기의 칠은 한국적 정서라는 문학적 연상을 위한 것으로 그리고 1950년대 말 한국 최초 추상운동인 앵포르멜은 당시 그 운동의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했다. 그런가 하면 1980년대의 민중미술은 분명한 각성을 시각적으로 이룩하지만 구상미술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봤다. 이들 각각의 시기에 적용된 칠은 한국인의 시각으로 지속적으로 복구되고 재해석되어야 할 대상이고 그만큼 당대를 시각적으로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들 시기를 한꺼번에 공유하는 세대들이 미술현장에 함께 하고 이들간의 모습을 지켜본 눈치 빠른 문화센터의 수강생과 그들의 환경이 결국 시각적 훈련 없이 칠만으로 현대미술의 현장에 도전하는 배포를 가능케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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